빚 때문에 포기했던 일들

AHN

내 선택은 늘 ‘통장 잔액’이 먼저였다

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,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건 ‘카드 결제일’과 ‘통장 잔액’. 빚이 많았던 시절, 제 인생은 늘 ‘가능성’이 아니라 ‘잔액’을 기준으로 움직였고, 그 결과 수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야 했습니다.

이 글은 제가 실제로 빚 때문에 포기했던 일들, 선택하지 못했던 순간들, 그리고 그로 인해 느꼈던 무력감과 변화의 시작을 기록한 이야기입니다. 누구나 겪을 수 있고, 지금 누군가는 겪고 있을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.


1. 가장 먼저 포기한 건 ‘여행’이었다

친구들이 제주도로 여행을 간다던 날, 저는 통장 잔액을 확인하다가 조용히 단체 채팅방을 나왔습니다. 비행기표가 10만 원, 숙박까지 하면 20만 원 중반이면 가능했지만, 그 돈은 카드값으로 이미 예약된 돈이었기 때문입니다.

그 이후로도 해외여행, 워크숍, 캠핑 등 수많은 모임과 기회에서 저는 ‘일정이 안 맞아’라며 빠졌습니다. 사실 일정이 아니라 잔액이 안 맞았던 거죠.

“할부로 가면 되잖아.”

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대답했습니다.

“그 할부도 이제 감당이 안 돼.”


2. 자격증, 강의, 자기계발도 뒤로 미뤄졌다

어느 날, 하고 싶던 디자인 강의가 있었습니다. 총 8주 과정, 수강료는 38만 원. 정말 가고 싶었지만, 결제 버튼 앞에서 손이 멈췄습니다. 그 주는 카드론 이자 납부일이었고, 통신비도 밀려 있었기 때문입니다.

그 뒤로도 온라인 강의, 시험 응시료, 도서 구매 등 ‘투자’라는 이름이 붙은 소비는 모두 뒤로 미뤄졌습니다. 문제는 그게 단순히 ‘교육’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, 미래의 기회를 포기하는 일이었다는 점입니다.

그때 느꼈어요. 빚은 내 선택지를 줄이는 게 아니라, 내 가능성 전체를 작게 만든다는 걸요.


3. 만남도, 인간관계도 점점 줄었다

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돈이 듭니다. 밥값, 커피값, 교통비. 처음엔 그냥 ‘이번 달은 좀 줄여야지’ 했지만, 점점 연락도 줄어들고, 친한 사람들과도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.

무엇보다 힘들었던 건, 누군가가 “잘 지내?”라고 물을 때마다, 나는 잘 지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숨겨야 했다는 점이었습니다. 모임에서 빠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‘불참이 반복되면 이해 대신 거리감이 쌓인다’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.


4. 가족에게도 말 못한 고민

부모님 생신이 다가왔던 어느 해, 용돈 대신 문자 하나만 드렸습니다. “요즘 좀 바빠서 이번 주엔 못 내려갈 것 같아요.” 사실은, KTX표 살 돈조차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.

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, 말할 용기도 없던 날들이 이어졌고, 결국 가족과도 ‘거리’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. 경제적 거리라는 건 단순히 숫자의 간격이 아니라, 마음까지 멀어지게 만든다는 걸 처음 알게 됐습니다.


5. 자존감은 ‘선택하지 못하는 삶’에서 가장 무너진다

빚이 많다고 해서 매일 눈물 흘리는 건 아닙니다. 그보다는 원하는 걸 선택할 수 없을 때마다, 아주 조금씩 무너지는 자신감이 더 무섭습니다.

  • 사고 싶은 책을 넣어뒀다가 장바구니만 닫았을 때
  • 모임을 취소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을 때
  • “괜찮아, 다음에 하자”를 반복하면서 진짜 그다음을 놓쳤을 때

그렇게 제 자존감은 잔액과 함께 바닥을 찍었고, 그 시기에는 ‘계획’이라는 걸 세울 용기조차 없었던 것 같아요.


6. 변화는 작게 시작했다

그 모든 포기의 순간들을 반복하다가, 어느 날 한 문장을 썼습니다.

“내가 진짜 원하는 걸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삶으로 돌아가자.”

그때부터 시작한 건 거창한 변화가 아니었습니다.

  • 지출 내역 전부 기록하기 (엑셀 & 수기)
  • 자동결제 해지하고, 통신비 요금제 조정
  • 당장 필요 없는 앱 구독 중단
  • 부수입 10만 원 만들기 (중고거래, 설문조사 등)

그렇게 ‘할 수 있는 만큼’만 실천했더니, 한 달에 10만 원, 20만 원씩 잔액이 늘어났고, 그 작은 여유로 한 권의 책을 사고, 한 번의 만남을 선택할 수 있게 됐습니다.


마무리하며

빚이 만든 건 단순한 고정비 구조가 아니라, 선택의 제한, 삶의 위축, 감정의 조절장애였습니다. 그리고 그 무게는, 누가 대신 짊어져줄 수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.

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에도, 혹시 ‘내가 뭘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포기 중’인 분이 있다면… 그걸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어요.

저도 여전히 완벽하지 않습니다. 하지만 이제는 선택할 수 있는 삶을 되찾기 위해, 오늘도 잔액보다 ‘의지’를 먼저 보는 중입니다.

✉️ 문의: bredleypitt@naver.com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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